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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86. <△△△>군수휘영호선적비(郡守諱榮浩善績碑)
1. 문헌 목록 〉23. 23世 〉2. <요재공>증호조참판공휘성유행장(贈户曹叅判公諱成裕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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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요재공>동지중추부사휘항순묘갈명(同知中樞府事諱恒順墓碣銘)
同知中樞府事諱恒順墓碣銘 宇萬曾年文孝子趙公烈婦李氏外内二墓稔其家德肧胎孝烈公之生宜賢於人公諱恒順字良彦號松坡玉川趙氏忠獻公元吉其上祖主簿쀯壬辰殉義 贈判書公十三世考成裕卽孝子 贈童蒙敎官以公貴加 贈户曹參判妣全州李氏節烈婦父世臣孝寧大君后公生 哲宗辛亥早孤奉偏慈養兼志體爲悦親志弓馬取第以副司果陞副護軍尋陞嘉善同中樞親年己邵無意遠遊家居養親遂斷四方之志丁憂毀踰禮哀動倣人至誠安厝有神助 國哀亦哀素終制甲午東匪鴟張公方在疚匪輩相戒勿入曰孝子家其感於異臭亦如此仄聞王師南征輸餉委馬以助軍需服既闋不復渡漢水津曰榮不及養何事覓官明農是吾本分於目則慕之於心也固其可忘乎苦朝而慕夕而忘子而慕孫而忘者非永慕也必子子孫孫朝朝夕夕戀戀在玆未嘗斯順忘諸心其慕也永豈特如景慕遠慕者之淺淺爲也哉此齋之所以名也君曰善哉言乎我得矣因請記誌于齋之名與甄之亭郭之堂幷有辭乎曰未也凡物之傳在人不在文自古作而記之者何限而惟甄郭之名傳於世者以其有俊山牧隱之文也今得如兩先生之筆亦庶幾乎況余似學識甚淺何敢與論於壽後之文也然誼之所在不可以不文辭於趙君孝慕之心又有所感不避僭妄遂記顚末以竣後之君子云爾巳未七月既望司果公之壻康津金煥豊謹書耳使子遍及域内賢德之門日吾老不及汝其勉之享年六十二卒壬子六月二十九日葬再遷于回文之麓壬坐夫人全州李氏聖燦女六南完珹完曄完斗完龍完俊完基金煥豊李成文壻也孫曾繁衍不能盡載孫東沇以公事行徵爲牲石之銘老且病不堪爲力而既銘其考妣不獲辭銘曰父孝母烈生公曰篤移孝之忠菀有可覿事親日短躬耕竭力先見世亂息影滅跡甘處農畝力民代食此其遺安此其養德回文之阡是公四尺 乙卯陽月生明 幸州 奇宇萬 撰 동지중추부사휘항순묘갈명(同知中樞府事諱恒順墓碣銘) 나 우만(宇萬)이 몇년 전 효자 조공(趙公)과 열부(烈婦) 이씨(李氏)내외의 묘갈명을 지어 그 집안의 덕망을 익히 잘 알게 되었고 그 분들의 효열(孝烈)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공을 다른 사람보다 더 어질게 여겼다. 공의 휘는 항(恒順)이요 자(字)는 양언(良彦), 호(號)는 송파(松坡)이시다. 옥천조씨(玉川趙氏)는 충헌공(忠獻公) 원길(元吉)을 중시조로 한다. 주부(主簿) 훈(쀯)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순절하여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는데 공의 十三대 할아버지이시다. 아버지 성유(成裕)는 바로 효자로 동몽교관(童夢敎官)에 추증되었다가 공의 현귀함을 인하여 호조참판으로 올려 추증되었으며 어머니 전주이씨는 바로 열부(烈婦)인데 세신(世臣)의 따님이며 효령대군의 후손이다. 공은 철종(哲宗) 신해년(一八五一)에 출생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편모 밑에서 자라 어머니를 뜻을 받들고 음식을 잘 봉양하는 효성을 다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무과(武科)에 뽑혀 부사과(副司果)로 음식을 잘 봉양하는 효성을 다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드렸다. 무과(武科)에 뽑혀 부사과(副司果)로 부호군(副護軍)에 승진하였다가 얼마 후 가선 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면서 마침내 벼슬할 뜻을 버리셨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서는 예제(禮制)보다 지나치게 애통해하여 몸을 상하게 되니 옆 사람들이 지성에 감동하였다. 국상(國喪)에도 소복(素服)하고 예제를 마쳤다. 갑오년 난리에 공은 상중에 있었는데 그 동학도(東學徒)들이 서로 경계하기를 「이 집은 효자의 집이니 들어가지 말자.」고 하였으니 그들까지도 감동함이 이러하였다. 관군(官軍)이 남쪽으로 토벌하러 왔다는 소문을 듣고는 말에다 군량을 실어보내 군수(軍需)를 보탰다. 복(服)을 벗고는 다시는 서울에 가지 않으며 말하기를 「영화를 보일 부모가 계시지 않는데 벼슬은 해서 무엇하랴? 농사를 짓는 것이 내 본분이다.」하고는 아들을 시켜 경내의 현덕(賢德)한 집안을 두루 찾아보게 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늙어서 가지 못하겠다. 너는 더욱 힘쓰거라.」하였다. 향년 六十二세인 임자년 六月 二十九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이장하여 회문산(回文山) 기슭 임좌(壬坐)이다. 부인(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성찬(聖燦)의 따님인데 아들 여섯을 두었으니 완성(完珹) 완엽(完曄) 완두(完斗) 완룡(完龍) 완춘(完俊) 완기(完基)이며 김환풍(金煥豊)과 이성문(李成文)은 사위이다. 손자와 증손은 너무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한다. 그의 손자 동연(東沇)이 공의 행장을 가지고 와 비문을 청하는데 나는 늙고 또 병이 들어 감당할 힘이 없으나 이미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비명을 지었기 때문에 사양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버지는 효자 어머니는 열부 父孝母烈 공은 태어나면서 독실하였네 公生曰篤 효성을 충성으로 옮겨서 移孝之忠 완연히 볼만하였네 菀有可覿 부모 섬길 날 짧아서 事親日短 몸소 힘써 농사를 짓고 躬耕碣力 세상에 난리 날 줄 미리 알아 先見世亂 자취를 시골로 감추었네 息影滅跡 기꺼이 논밭에서 일하며 甘處農畝 힘들여 그걸 먹으셨네 力民代食 이것이 그분이 편안하게 여긴 것이며 此其遺安 이것이 그분이 기른 덕이네 此其養德 회문산의 네자 높이 무덤이 回文之阡 바로 공의 유택이라네 是公四尺 을묘년(乙卯年) 시월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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